철학적 논쟁
황기우 2022. 4. 24. 21. 55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교육은 각각 에듀카레와 에듀제레를 대표하는 좋은 사례이다. 에듀카레에 기반하는 스파르타는 국가와 개인의 발전을 상호 대립적 관계로 보았다. 개인의 발전보다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강제 교육을 실행하여 국가가 요구하는 행위를 아이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했다. 대조적으로 에듀제레에 기반하는 고대 아테네의 교육은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국가에 유용하다고 보았다. 자유로운 시민 육성을 강조하는 자유교육을 실행했다.
스파르타는 매우 고통스러운 훈련의 결과인 군인다운 능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아테네는 시민들의 내적인 근원에서 나오는 용기와 다재다능성의 성취를 강조했다. 예를 들어 똑같은 군사훈련에서 스파르타는 젊은이들에게 획일성과 유사성을 강요했으나 아테네는 자유롭게 자기 태도를 형성하여 자기 길을 가며 성장하는 다양성을 촉진했다. 결국 획일성을 강조한 스파르타는 멸망하고 개인의 다양성과 자유를 허용한 아테네는 번영을 누렸다.
Bass와 Good(2004)는 오늘날 교육을 둘러싼 소란스러운 논쟁의 근원을 교육의 어원적 의미에서 찾는다. 교육을 의미하는 에듀카레와 에듀제레의 두 가지 라틴어의 어원은 수 세기 동안 혼용되어 오면서 보수적인 교육학자와 진보적인 교육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교육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교육의 어원상의 차이는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실제로 매우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두 진영은 에듀카레와 에듀제레를 놓고 서로 자기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이것을 교육의 ‘불가피한 긴장’으로 특징짓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지식과 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여 신세대를 소위 그들의 부모 모습대로 형성하는 것을 교육으로 정의한다. 다른 쪽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변화에 대비하여 미지의 문제를 발견하여 해결하도록 신세대를 준비시키는 것이 교육이라고 정의한다. 에듀카레와 에듀제레는 모두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학습자의 전인 발달을 도모하는 데는 양자 모두 문제가 있다. 에듀카레는 개인의 천재성과 자유의지를 억압할 우려가 있다. 반면 에듀제레는 그것을 끌어내기 위한 “학습자의 선택”에 한계가 있다. 우리 사회는 반복하고 훈련하여 지식을 통달한 학습자도, 질문하고, 생각하고, 창조하는 학습자도 필요로 한다.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일부 주창자들이 교육이 이런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만족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자의 절충이나 균형은 21세기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대격변의 시대에 균형이나 절충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첨단 기술 기반의 디지털 시대에 단순히 시험에 통과하여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 후에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는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은 급변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 문제해결력 등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관성적으로 종래의 그런 개념, 이론, 실천, 그리고 활동을 허용하다 보면 결국 ‘에듀카레’에 힘을 실어 전통 교육의 생명을 더욱 연장할 뿐이다. 좀 더 에듀제레에 힘을 싣는 새로운 교육 개념의 모색이 시급한 시점이다.
※敎와 育의 어원으로 이어집니다.
참고 문헌
Randall V. Bass & J. W. Good(2004)., Educare and Educere: Is a Balance Possible in the Educational System? The Educational Forum 68(2):161-168.
Stagiritecorner(2018),. Education as ‘Educare’ and Education as ‘Educere’Posted on March 18, 2018,
https://stagiritecorner.wordpress.com/2018/03/18/education-as-educare-and-education-as-educ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