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관점

 

황기우 2022. 4. 20. 22. 15

 

에듀카레와 에듀제레의 개념은 교육 철학에서도 대립하는 관점을 나타낸다. 특히 형이상학과 인식론에서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철학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형이상학은 “신은 있는가?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진짜인가?”등의 질문처럼 사물의 본질,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을 통해 탐구하는 철학의 영역이다. 인식론은 인식과 지식의 기원, 구조, 범위, 방법 등을 연구하는 철학의 영역이다. 즉 ‘앎’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에듀카레와 에듀제레는 각각 형이상학적으로는 실재론과 관념론을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는 경험론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실재론과 관념론을 논하기에 앞서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고목 나무 한 그루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람들이 ‘쿵’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무는 존재하는가?”

 

 

실재론과 경험주의

 

에듀카레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실재론을 따른다. 실재론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잘 부합하는 세계관이다. 실재론에서는 인식의 대상을 사람의 의식이나 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올바른 인식의 목적이나 기준을 객관성에서 찾는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사물은 우리의 인식과 독립해 있는 존재이며 우리가 사물에 대하여 갖는 지각이나 인식과 관계없이 존재는 실제로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실재(reality),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세계와 사물이고 인간의 ‘의식’은 다만 거기에서 나타난 하나의 부차적 현상으로 여긴다. 인식의 대상(사물)이 인식주체의 인식을 초월하여 그 자체로 바깥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 존재는 물질일 수도 있고 정신일 수도 있다.

 

위 질문에서 실재론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더라도 고목의 존재를 인정한다. 내가 비록 고목을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고목은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즉 고목이 내 인식 밖에 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재론에 따르면 실재는 우리가 인식하는 눈에 보이는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실재에 대한 우리 지식은 우리가 보는 물질세계로부터 시작하여 비물질적인 세계(정신세계)로 발전한다. 이는 특별한 것에서 일반화에 이르는 귀납법의 과정을 따르며 지식은 알려진 것에서 미지의 것으로 나아가는 결과물로 본다.

 

“경험론은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하며

본유 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

 

실재론은 인식론적으로 경험주의의 근거가 된다. 경험주의는 우리의 인식(지식)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로지 감각적 경험에 따라서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주장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정확성을 확인할 경우, 그 사람의 주장을 참다운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경험주의자들이 지식의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방법은 관찰, 실험, 검증이기 때문에 경험주의에서 지식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검증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에듀카레는 흄의 경험론을 표방한다. 흄은 의식은 자신이 존재의 개념을 얻게 되는 고유한 상태를 객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지식은 본질상 일종의 기계적인 경험이다. 지식은 감각적인 인상으로부터 나오기에 정신이나 인간의 뇌는 지식 습득에서 기계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태어날 때는 빈 서판 상태이며 감각으로부터 얻은 경험이 그 위에 글을 쓰거나 인상을 남긴 것이라고 믿는다.

 

관념론과 합리주의

 

에듀제레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플라톤이 주창한 관념론을 따른다. 관념론은 철학자들에게 친숙한 세계관이다. 관념론은 실재론이나 유물론과 달리 우리가 인식하려는 세계는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한 관념 세계라고 주장한다. 관념이나 관념적인 것들을 실재적 또는 물질적인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 우위의 철학적 관점이다. 관념론자들은 실재는 관념과 사고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즉 실재는 정신적 실체일 뿐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과 사고의 외부에는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에 의하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먼저 우리의 ‘의식’이고, 객관적인 외부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의해서 이차적으로 그 질서와 실재성이 증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위 질문에서 관념론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면 고목의 존재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고목을 인식하지 않으면 고목은 실재하지 않고 인식되지 않은 고목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즉 고목은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하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관념에 종속되어 있다.

 

“합리주의는 본유 관념의 존재를 인정하고 본유 관념을 통하여

사실이나 존재에 대한 인식의 원리를 설명한다.”

 

관념론은 인간은 관념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정신에 내재해 있다는 소위 본유 관념(생득관념)을 주장한다. 플라톤은 지식이 사람 안에 있다고 믿고 이것을 메노와 대화에서 설명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지식이 있고 올바른 조건에서 지식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기하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노예 소년이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통해서 정교한 이해를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증명했다. 관념론은 실재는 관념(이데아)으로 이루어지며 물질세계는 영혼이 가지고 있는 관념의 세계를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관념론에 따르면 영혼은 관념에서 나와서 인간의 육신으로 통합된다. 플라톤은 이 관념의 ‘상기(recollection)’를 모든 지식을 얻는 방법, 즉 상기설을 주장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실재를 어떻게 생각하여

나중에 그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영혼은 정신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관념론은 인식론적으로 합리주의의 근거가 된다. 합리주의는 비합리적, 우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이성적, 논리적, 필연적인 것을 우선한다. 이성의 견지를 중요시하고 사상, 생활의 일체를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 규정하려는 태도이다. 이는 개별적, 우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일체가 보편적 법칙의 논리적 필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한 데카르트는 합리주의의 대표자이 다. 그는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정확하지 않으며 지식은 경험에서 시작한다는 경험주의를 배척한다. 그에 따르면 경험은 사람마다 다른 주관적인 지식일 뿐 전체를 알 수 없으며 일부분만 아는 단편적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데카르트도 이성만이 우리에게 분명한 지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비커 속의 구부러져 보이는 막대는 진짜 막대가 아닌 것처럼 “우리의 감각이 알려 주는 지식은 믿을 수 없다.”라는 논리를 편다. 그는 생각하는 인간과 이성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성의 능력으로 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에듀제레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를 표방한다. 합리주의는 인간의 정신은 태어날 때부터 내재적 관념을 가지고 나오며 이성과 정신이 지식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본질상 인간은 관념(생각)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지식은 일반적,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특별한 것으로 나가는 추론 과정. 즉 연역법의 과정을 따른다. 실재는 본질상 우리의 관념과 사고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생각할 수 있으며 상상력으로 인하여 더 풍요롭게 될 수 있다.

 

※철학적 논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