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카레와 에듀제레

 

황기우 2022. 4. 10. 23. 10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면 대부분 부모는 대견스러워하며 마음이 설렌다. 큰 고민거리는 없다. 그냥 남들처럼 내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교육”은 곧 학교라고 믿으며 관성적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교육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미래에 대비하는 일부 부모들은 아이의 교육과 장래를 놓고 힘든 시간을 보낸다. 과연 내 아이에게 알맞은 교육이 무엇인지 고뇌하며 수많은 책을 뒤지고 귀동냥을 하며 갖은 노력을 다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표류하다 드디어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언스쿨링을 시작한다. 하지만 대안을 찾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교육에 대해 성찰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교육’이 학교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학교는 거의 교육이 아니다.”

 

언스쿨링의 실천에는 많은 난관이 따른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다. 그때마다 희비가 교차한다. 좋은 날만 계속되면 좋으련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하루하루가 버겁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울 생각을 먼저 한다. 하지만 교육 철학과 이론을 튼튼하게 다져두면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초심을 굳건히 지켜 낼 수 있다. 이런 소박한 마음에서 먼저 교육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교육자든 전문가든 마치 교육에 대해 잘 아는 식으로 말한다. “교육은 인간 형성 작용이다. 인간 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다. 선 세대의 가치를 후세대에 전하는 문화 전수다.” 등 이러쿵저러쿵 나름대로 정의한다. 보통 교육학 개론서에서는 교육을 “아이의 잠재력을 밖으로 꺼내 실현하도록 안내한다.”라는 정도로 서술한다. 하지만 실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껏 학문적으로 합의된 결과가 없다. 교육은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다이아몬드는 보는 각도에 따라 수천 개의 빛을 발한다. 자칫하면 코끼리의 꼬리를 붙잡고 코끼리라고 우기는 우를 범할 판이다. 우리는 물론 전문가들도 아직 교육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하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학문적으로 일치된 개념 정의가 어려울 때는 보통 어원적인 접근에서 출발한다. 특정 단어가 생겨난 시대적 배경과 용례를 조사해보면 본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라틴어의 에듀카레(educare)와 에듀제레(eduacere)에서 유래했다. 교육 철학에서는 두 가지 어원을 둘러싸고 미묘한 의견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어원 분석의 차이는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에

교육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에듀카레의 어원

 

에듀카레의 어원은 “형성”“주조”“가르침” “훈련”을 의미한다. 원래 “교육”은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준비하는 훈련이나 반복연습을 뜻했다. 동양의‘스승 사(師)자가 군대에서 나왔다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에듀카레는 아이들이 문화적 유산과 조직된 경험을 접하는 과정이다. 훈련과 가르침을 위주로 특정 지식, 기술, 행동 방식을 주입하는 개념이다. 이는 외부에서 내부로 투입하는 것을 시사한다. 에듀카레는 교수자가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학습자를 교정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에듀카레는 교수자가 원하는 형태로 학습자를 틀에 맞춰 찍어내는 주형으로서 교육이다.

 

주형의 비유는 교육이 적어도 교수자가 학습자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여 학습자를 후천적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잘 설명한다. 주형으로서 교육은 장인이 쇳물을 틀에 부어 모양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즉 아이들을 틀에 넣고 교사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사의 역할과 교육내용이 중요한 교사 중심 교육을 강조한다. 교수자는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존재이며 학습자는 그런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각인시킨다. 한마디로 교사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에듀카레이다.

 

에듀제레의 어원

 

에듀제레는 에듀카레와 반대의 개념이다. 에듀제레의 어원은 “안내”“끌어냄”“생산”을 의미한다. 에듀제레는 아이의 내적 능력을 밖으로 꺼내서 실현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미 가지고 태어난 잠재력을 밖으로 끌어내서 잘 자라도록 조력한다는 뜻이다. 즉 무지에서 지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동굴 속의 무지”에서 “지식의 빛으로” 이끄는 일이다. 이런 “끌어냄”의 관점에서 보면 지식은 이미 아이들의 내부에 존재하며 밖으로 “끌어낼” 필요를 시사한다. 에듀제레는 아이들은 선천적인 능력으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며 교수학습 과정에서 교수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관점을 학습자가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에듀카레가 주형으로서 교육이라면 에듀제레는 기르는 교육, 혹은 성장으로서 교육이다. 성장으로서 교육은 식물의 성장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식물이 스스로 자라듯 교육도 아이들의 선천적인 잠재력을 자연스럽게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 비유에서 교육의 주도권은 식물에 해당하는 아이들 자신이며, 정원사에 해당하는 교사는 식물이 잘 자라도록 좋은 토양, 물, 햇빛을 공급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에듀제레는 식물의 성장이 전적으로 식물의 고유한 특성과 자연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듯 교육도 아이들의 타고난 특성과 잠재력을 발달 단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현해 가도록 조력하는 것으로 본다. 에듀제레는 가르침이 아닌 학습자 자신이 스스로 배우고 익히며 성숙하는 과정인 배움을 강조하는 아동 중심 교육이다.

 

“교육의 두 가지 어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에듀카레는 훈련하거나 주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듀제레는 밖으로 끌어내거나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수학습방법의 함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