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언스쿨링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선택한 활동과 인생의 경험에서 얻는 교육이다.
개념
언스쿨링은 학교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부모들의 정의
언스쿨링의 원리
언스쿨링의 인접 개념
언스쿨링은 먼 인류 역사에서 최근까지 수천 년간 아이들이 종일 자기 열정과 관심을 추구하며 자유롭게 놀면서 배운 원초적인 교육 방식의 최신 버전이다. 우리 조상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르침이 없이 모두 자기교육(self-education)을 통해 배웠다. 인간과 포유류들이 태초부터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이런 방식으로 배운 점에서 언스쿨링은 가장 오래된 교육의 원형이다.
“언스쿨링(unschooling)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랑은 무엇인가?”
또는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를 바 없다.
언스쿨링은 사람마다 다양하게 정의하기 때문에 실제로 보편적인 개념 정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언스쿨링은 아이들은 타고난 학습자라는 철학적 전제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은 끝없는 호기심, 배움에 대한 열정, 자기 시간표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며 강요되지 않은 자기 주도적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배운다. 언스쿨링은 아이들이 자기교육의 책임을 지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곳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배우는 철저한 아동 중심의 자연 학습이다.
언스쿨링의 개념 정의는 매우 다양해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간단하게 정의하면 “언스쿨링이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곳에서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메리 그리피스).
언스쿨링은 배움은 아이들에게 미리 정해진 교육과정, 지침, 표준의 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타고난 능력과 독특한 관심을 양육함으로써 촉진되는 유기적 과정이다.
아이들은 뭔가를 강요하면 기쁨이 사라지고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배우는 시늉만 할 뿐 실제로 배우는 것이 없다.
언스쿨링의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한 학교 교육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학교는 교육과 관련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그야말로 만물상이다. 교육과 관련된 것이면 없는 것이 없다.
하지만 언스쿨링에는 “수업목적, 수업 계획, 교육과정, 과제, 시험, 암기, 성적, 교사도 없다.
부모가 아이의 교사가 되지 않는다. 집 안에 교실을 복제하지도 않는다.” 교육의 기본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학교가 없는 배움을 믿을 수 있는가? 학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수 있으며 여전히 배움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통제된 사회에 살고 장기간의 학교 교육을 받으며 의식이 상당 부분 조건화되어서
학교 없는 배움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언스쿨링이 황당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잠시 눈을 돌려 우리 사회의 규범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어떻겠는가?
멈추지 않는 학교 러닝머신에서 발을 떼면 어떻겠는가?
다른 사람이 당신을 위해 설계한 방식대로 배울 필요가 없다면 어떻겠는가?
배움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하지 않은가?
언스쿨링은 학교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학교 없이 생활하고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배울지를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기억하자. 아이들은 타고난 학습자다! 자기 관심을 추구하고 자기 방식에 따르고 또래와 비교하지 않고 자기 속도로 배우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자유다. 우리가 알고 있던 학교 교육에 의문을 제기하고 아이들의 타고난 학습 본성을 신뢰하고 아이들의 타고난 능력과 관심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지켜보는 것이 언스쿨링이다.
“언스쿨링은 학교 교육이 아니다. 언스쿨링 부모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며 집에서도 학교 방식의 교육을 하지 않는다. 미리 정해진 교육과정도 없고 교육의 목적에 따른 특별한 과제도 없다.
아이들의 진보 상태를 평가하는 시험도 없다. 대신에 아이들에게 자기 관심을 추구하고, 그런 관심의 추구를 위해서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을 자기 방법으로 배우는 자유를 허용한다.
삶과 배움은 진공 상태가 아닌 문화적 맥락에서 일어난다. 언스쿨링 부모는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의 배움에 필요한 환경과 자원을 제공한다. 언스쿨링의 핵심은 부모와 아이 간의 깊은 신뢰와 긴밀한 관계이며 가족으로서 자유롭게 사는 삶이다.”
-언스쿨링의 저자, 피터 그레이
부모들은 어떻게 정의하는가?
“언스쿨링은 삶과 배움의 자유다. 우리는 학교 교육의 패러다임과 통제를 떨쳐내고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교육의 진로를 개척할 것을 신뢰한다. 아이들이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 가치가 있다. 우리는 아이를 신뢰한다.”
“우리에게 언스쿨링이란 교육과정, 과제, 시간표, 목표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언제 배울지는 아이들의 책임이다.”
“언스쿨링은 자연스러운 학습과 열정이 번성할 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서로에 대한 연결, 흥미와 열정, 즐거운 삶을 함께 누리길 원한다.
부모로서 우리는 내 아이의 경험 많은 동반자이자 안내자로서 아이들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는 자료와 사람들을 연결하고 지원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흥미로울 수 있는 사물, 장소, 사람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강요하거나 거부감을 느끼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아이가 관심 있는 주제를 탐구하도록 격려하며 아이에게 유용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부모로서 의무라고 믿는다. 우리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배우거나 매일 새롭거나 교육적인 일을 하라고 요청한다.”
“언스쿨링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학교에서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들을 집에서 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이들에게 교과과정을 제공하지 않고, 특정 과제를 교육목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며, 진도를 측정하기 위한 어떤 시험도 부과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아이들이 자기 관심을 추구하고, 자기 방법으로 배울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
또한 아이들에게 필요한 학습 환경을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한다. 그들은 삶과 배움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환경의 맥락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아이들이 그런 환경과 접촉하도록 돕는다.”(피터 그레이와 지나 라일리; 2013).
언스쿨링의 원리
학습은 항상 일어난다.
우리 뇌는 24시간 작동을 멈추는 일이 없다. 뇌가 기능을 중단하면 생명도 함께 사라진다.
배우는 시간과 배우지 않는 시간으로 나누지도 않는다. 구조상 불가능하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
사람들이 듣고,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모든 것은 일종의 학습 결과를 낳는다.
학습은 강요가 필요 없다.
학습은 아이들의 의지에 반하여 강요될 수 없다.
강압은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의욕을 꺾고 화나게 하고 저항하게 한다.
학습은 기쁨을 선물한다.
사람은 뭔가를 스스로 배우면 만족스럽고 보람을 느낀다.
강요된 학습은 오히려 학습을 방해하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학습은 어렵다고 느끼면 더 어려워진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학교식 교수법은 배움은 어렵고 아이들이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학교 수업은 내부에서 발산하는 학습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요하는 가르침이다.
학습은 유의미해야 한다.
배우는 정보나 지식이 “실제 세계”와 관련이 없거나 유용하지 않으면 학습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이어서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학습은 부수적이다.
학습은 의도적인 결과가 아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관심을 추구하며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인 결과물이다.
학습은 사회적인 활동이다.
학습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고립된 상황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
학습은 관련 지식과 기술이 풍부한 성인들에게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학습은 평가가 필요 없다.
배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은 불필요하다. 일상에서 배운 기술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주제에 대해 풍부한 지적인 대화를 나누면 저절로 알 수 있다.
학습은 감정과 지성을 포함한다.
학습 과정에서 감정과 지성은 대립하지 않으며 별개로 분리되지도 않는다.
모든 학습은 지성과 감정을 포함한다.
학습에는 안전 의식이 요구된다.
두려움은 학습을 차단한다. 수치심, 당혹감, 스트레스, 불안은 학습을 방해한다.
언스쿨링의 인접 개념
언스쿨링(Unschooling)과 학교 교육(schooling)
학교 교육은 국가가 직접 교육을 통제하는 교육이다. 이른바 공교육이다.
학교 교육은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여 사회의 유능한 성원으로 편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학교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교한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여 모든 아이에게 똑같은 교육과정을 부과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표준화하여 가르친다. 결국 최종 산물은 평균적인 아이들의 대량생산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자유, 행동, 개성을 억압하기 때문에 교육은 강제성을 띠게 된다.
언스쿨링은 학교 교육의 방식을 거부하고 아이들이 자기 관심을 자신의 속도에 따라서 성인의 가르침 없이 자유롭게 배운다.
학교 교육이 강제 학습이라면 언스쿨링은 자유 학습이다.
언스쿨링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계획한 교육 경로를 따르지 않고 오직 아이들의 관심, 호기심에 이끌려 배우는 자연학습이다.
언스쿨링과 학교 교육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언스쿨링과 전통적인 학교교육의 차이점
| 학교 교육 | 언스쿨링 |
교과서 | 교과서에 의한 학습 | 여러 교과를 넘나드는 관심에 의한 학습 |
목표 설정 | 교사가 정한 목적 | 학습자가 정한 목적 |
지식전달 | 지식은 교사가 학습자에게 전달한다 | 지식은 학습자에 의해서 습득되고 부모와 교사에 의해서 장려된다 |
학습자료 | 특정 교육과정과 교과서 | 책, 부모, 형제자매, 인터넷, 옥외 박물관, 생활 경험에서 나오는 자원 |
구조화 | 일정표의 구조화 | 일정이 없고 재즈와 같다. 학습자의 변화에 즉응 |
학습방법 | 학교의 지시에 따른 학습
| 학습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 |
학습 속도 | 학교 행정가나 교사가 정한 속도 | 학습자가 정한 자기 속도 |
학습 발생 | 학습이 일어나는 특정 시간이 정해져 있다 | 학습은 연중 내내 항상 계속 일어난다 |
언스클링과 홈스쿨링
언스쿨링과 홈스쿨링은 홀트의 한때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했다. 비록 용어는 달라도 같은 의미로 읽었다.
그러므로 언스쿨링과 홈스쿨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차(car)와 자동차(automobile)의 차이를 묻는 것과 같다.
하지만 70년대에 홀트가 언스쿨링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후 언스쿨링이 홈스쿨링의 우산에서 벗어나면서 각각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언스쿨링이 홈스쿨링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다. 언스쿨링이 홈스쿨링에서 분리되어 나오기는 했으나 아직도 많은 공통점이 있다.
언스쿨링은 학교 교육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광의의 홈스쿨링의 개념에 포함된다.
하지만 홈스쿨링이 학교 방식을 따르는 점에서 언스쿨링과 구분된다.
그러므로 위 질문은 현재 차와 페라리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언스쿨링과 홈스쿨링의 차이는 학교 교육과 관계 설정에서 시작한다.
대개 홈스쿨링이 집 안에 학교를 복제하고 학교 방식의 교육을 고수하는 반면 언스쿨링은 학교 방식의 교육을 모두 배척한다.
이를테면 홈스쿨링은 학교의 교육과정이나 교육 방법을 수용하고 특정 교과, 사회화, 도덕과 품행 등을 부모가 직접 관리한다.
일부 홈스쿨링 가정은 학교에서 사용하는 책상과 교과서를 사용하며 심지어 매일 종을 치고 충성의 서약을 말하고 나서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
부모는 수업을 계획하고 숙제나 시험을 부과하며 시험지를 채점하는 등 교사의 역할을 한다.
그들의 "성배”는 아이들이 배울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될 완벽한 교육과정을 탐색하는 것이다.
반대로 언스쿨링은 학교의 교수 방법과 학교 환경과 수용하지 않는다. 교사, 교육과정, 교과서 시간표, 시험 등이 없다.
모든 학습 책임은 아이들에게 있다. 아이들은 자기 학습을 통제하고 자기 관심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놀고 탐구한다.
부모는 교사가 아니며 필요한 학습 환경을 조성하고 개입을 최소화하는 조력자와 촉진자일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언스쿨링과 홈스쿨링은 교육과정, 학습의 구조화, 학습 목표 설정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홈스쿨링은 학교 교육과정을 따르고, 학습 내용과 방법 등이 미리 계획되어 있고 학습 성취를 평가한다.
반면 언스쿨링은 학교 교육과정이 없으며 아이들의 관심에 따라 배운다.
학습 내용과 방법 등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성취할 목표를 설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
홈스쿨링이나 언스쿨링의 세계에서 정통주의나 순수주의자는 거의 없다. 최근 가정교육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변화는 이를 잘 대변한다.
홈스쿨링은 학교 교실의 복제 방식에서 벗어나 비구조화를 지향하고 언스쿨링은 자유로운 방식에서 탈피하여 구조화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가정교육이 순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유연한 노선을 걷는 과정에서 파생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가정교육이 라이프스타일로 정착하면서 가정교육에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자유 홈스쿨링, 느슨한 홈스쿨링, 열린 언스쿨링, 하프 언스쿨링, 하이브리드 언스쿨링 등 다양한 분화와 함께 가정교육의 스펙트럼도 크게 확장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고착하면 굳이 홈스쿨링이나 언스쿨링을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정교육이 개인의 세계관, 가치관, 삶의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형식을 띨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로 이해한다면
홈스쿨링이나 언스쿨링의 경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더 이상으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언스쿨링과 디스쿨링
원래 디스쿨링의 용어는 1970년대에 이반 일리치가 저술한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에서 유래했다.
일리치는 현대 산업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 즉 비인간화, 물량주의, 소외, 빈부의 격차, 그리고 그런 격차를 조장하는 여러 사회제도를 분석하고
그 원인을 학교 제도에서 찾았다. 그는 학교 교육의 제도를 폐지하고 비공식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을 강조하면서 탈학교의 개념을 주장했다.
일리치의 주장은 1970년대 이후 개방학교, 자유 학교, 비형식 학교 등 대안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언스쿨링에서 말하는 디스쿨링은 일리치의 개념과 전혀 다른 의미이다. 언스쿨링에서 말하는 디스쿨링은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언스쿨링을 시작할 때 겪는 적응 기간이다. 학교 교육에서 언스쿨링으로 옮겨가는 일종의 과도기인 셈이다.
언스쿨링을 계획한 부모들이 일단 아이를 학교에서 중퇴시킨 후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안내할 시간이 필요한데
디스쿨링은 바로 이 한시적인 시간을 말한다.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바로 언스쿨링을 시작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그간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학교가 남긴 독성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디스쿨링은 언스쿨링을 준비하는 디톡스 기간에 해당한다.
디스쿨링은 아이가 학교 교육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도록 조력하는 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학교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조건화되었기 때문에 디스쿨링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뭔가 배우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교과서, 교사가 있어야 하고 특정 교과에는 특정 방법이 필요하고 학습 결과가 없으면 배우지 않았다는
생각이 관성화되어 있다. 이런 것은 언스쿨링에서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버리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디스쿨링 기간은 아이가 학교에 다닌 기간과 비례한다. 아이가 학교에 다닌 기간이 길수록 디스쿨링 기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학교에 다닌 기간이 1년이라면 디스쿨링 기간은 1개월로 잡는다. 그러므로 디스쿨링 기간은 수주에서 수개월까지 걸릴 수 있다.
언스쿨링과 급진적 언스쿨링
급진적인 언스쿨링(Radical unschooling)은 언스쿨링의 철학을 학습뿐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으로 확장한 개념이다.
한마디로 학습을 넘어 가족 단위로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다.
아이들이 언제 잠자고,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 언제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읽을지, 무엇을 들어야 할지,
어떤 종류의 프로그램을 얼마나 시청할지 등을 모두 아이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긴다.
아이들은 피곤할 때 단순히 잠자리에 들고, 원할 때만 청소를 하고, 무엇이든 먹고 싶은 장소에서 먹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며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 위생에 관한 규칙조차도 강요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부모와 동등한 발언권을 보장한다.
언스쿨링이 아이들의 학습을 신뢰하는 것처럼 급진적 언스쿨링은 다른 생활영역에서도 아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급진적 언스쿨링은 단순히 학교학습이 아닌 것을 의미했던 언스쿨링에서 더 벗어난 개념이다.